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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일기와 그림   


http://blog.naver.com/hohohj2413/60011937920

1879.8.15
이번에 네가 다녀간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말해주고 싶어서 급히 편지를 쓴다. 꽤 오랫동안 만나지도, 예전처럼 편지를 띄우지도 못했지. 죽은 듯 무심하게 지내는 것보다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게 얼마냐 좋으냐. 정말죽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1881.11.10~11
이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 내 존재를 주저 없이 내던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승산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나를 던진다 해도 승산은 아주 희박하지. (...)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


1883.12.15
아버지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의식적으로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덩치가 크고, 털이 많으며, 집안에 지저분한 발을 하고 드나들 게 분명한 개를 집에 두기 망설이는 것처럼 나를 집에 들이는 걸 꺼려 한다.





1884.10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8.6.18
언제쯤이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멋진 친구 시프리앙이 말한 대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서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서는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인지도 모르지.





1888.6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1888.10.24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될 수 있으면 아주 많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우리가 써버린 돈을 다시 벌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전혀 없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 걸...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원하는 건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1889.1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1889.9.7~8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겁이 난다. (...)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작은 성공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 정신병원 철창을 통해 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을 내다보면서 느꼈던 고독과 고통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 그건 불길한 예감이다.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 나야 할 것 같다.




Gogh & Edison   


고흐 :
van Gogh [vn gu/-gx, -gf]
Vincent ~ 반 고흐(1853-90: 네덜란드의 화가).
http://vangogh.dreamwiz.com/
http://www.vangoghgallery.com/
http://www.vincent.nl/
http://www.ibiblio.org/wm/paint/auth/gogh/

Gogh, Vincent van(March 30, 1853, Zundert, Neth.~ July 29, 1890, Auvers-sur-Oise, near Paris)는 Rembrandt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델란드 화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현대 예술의 표현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단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한 color와 거친 화풍 그리고 그를 결국 자살에까지 몰고 간 정신질환의 고통을 담고있어  우리에게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다수의 자화상과 우리에게 잘 알려진 The Starry Night가 있다.


짧은 생애를 태양처럼 뜨겁게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 그 불꽃 같은 뜨거운 삶과 화가로서의 그가 남긴 편지는 회화와 더불어 영원 불멸할 문학 작품이다


천재 화가
해바라기꽃, 등등
1남 1녀중 장남
동생은 그림 판매상
37세까지 삶
열정적 화풍
그림이 주 창작물
생전에 자본적 혜택 없음
생전에 자본주의적 활동 적음
생전에 창작물이 대중 호응 적음
창작물이 고흐 자신의 정신적 세계 (개인적 내면세계 강함)
생전에 고생 사후에 인정

그림 중에 가장 비싼것은 빈센트 반 고호의 Dr.Gachet의 초상화가
1990년 뉴욕 경매시장에서 한화기준으로
1080 억원
정도에 거래된것이 최고기록으로 되어 있다.








에디슨 :
Edison  
Ed·i·son [dsn]  
Thomas Alva ~ 에디슨(1847-1931: 미국의 발명가).  



천재 발명가
축음기, 전구, 전화, 필름, 등등
초등학교에서 퇴학 당함.
생전에 자본적 혜택 받음.
전자제품이 주 발명제품.
생전에 자본주의적 활동 많음.
생전에 발명제품이 대중적 호응 얻음.

발명품이 대중적 전자제품 다수.
발명품이 현실에 필요, 대중적 요소, 전자, 편리성









[전자제품 개발 참고자료] - ------------------------------------------------
전자제품 (필요성, 편리성)
007영화 비밀무기 제품화 분석
초능력자(스파이더맨, 슈퍼맨, 배트맨)영화 전자제품화 분석
공상과학 영화 장비 제품화 분석
드래곤볼의 스카우터(기 측정 안경) - 공학의 센서 기술이 중요함 -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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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과 고흐의 삶을 새벽의 고요속에서 마음으로 가만히 되새기면
뭉~~~~~~~~클하다.
두 재능인의 삶은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만일 두 삶 중 하나의 삶을 택하라면 .. ???????

고흐의 생전과 생후는
매우 극적이다
본인에게 생전의 고통과 사후의 영광..
현대인에게 위안..(현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재능인에게)

에디슨의 발명(사고, 의식, 정신세계)은 대중적, 현실적, 자본주의적 측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고흐의 삶에 마음이 끌리지만
에디슨 발명의 필요성, 대중적 , 전자, 편리성 요소에 관심.

에디슨   


http://kid.chosun.com/kidstudy/edu4i/kidchosun/scientist/20010406.htm
미국의 발명가.
미국의 발명가인 에디슨은 평생 미국에서 살면서 연구활동을 했습니다. 에디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만든 발명가로 1천 93개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얻었습니다.



에디슨의 청소년기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던 캐나다 출신의 아버지 새뮤얼의 셋째아들로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습니다. 7세 때 가족이 미시간주 포트휴런으로 옮겨 에디슨은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개월만에 퇴학당하고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여 지하실 한쪽 구석에 실험실을 설치하고 실험과 공작에 몰두하였습니다. 12세 때 철도의 신문팔이 소년이 되어 집에 있던 실험실을 열차 안으로 옮겼는데 1862년 이 실험실에 화재가 발생하여 차장에게 맞아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같은 해에 역장의 아이를 구해준 답례로 전신술을 배우게 되어 69년까지 각지에서 전신수로 근무하였습니다. 이때 보스턴에서 M.패러데이가 쓴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를 읽고 설명에 복잡한 수식(數式)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감탄하여, 그 책에 나와 있는 실험을 모두 시험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소속되어 있던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를 그만두고 전기식 투표기록기를 발명하여 69년에 첫 특허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의회에서의 표결을 전신에 의해 자동적으로 기록하는 기기였는데 채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제2의 발명인 주식시세 표시기는 남북전쟁 직후 투기붐이 일어난 월스트리트에서 5000달러에 팔려고 생각했던 것이 4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이 자금을 밑천으로 71년 뉴저지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우고 이곳에서 5년간 발명에 전념하였습니다. 그해에 인쇄전신기, 72년에 이중전신기, 74년에 사중전신기를 발명하였습니다. 전신기술은 1873년 공황 후 급속히 보급되었다.



에디슨이 자라난 곳

토마스 엘바 에디슨(애칭은 엘)은 미국 오하이오주 미란이라는 곳에서 2월 11일 태어났습니다. 에디슨은 어린 나이에도 실험을 시작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의 미란 이라는 곳은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였습니다. 19 세기 초에는 운하가 그 당시의 고속도로인 셈입니다. 미란과 휴런강을 잇는 휴런운하는 에리호로 흘러 대서양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미란은 중요한 항구이었습니다. 그러나 철도가 오하이오로 들어오게 되면서 미란을 지나지 않게 되자 교통중심으로서의 이곳의 중요성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7살이 되었을 때 미시간주의 휴런 항구도시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에디슨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집옆에 큰 관측 탑을 세웠습니다. 관광객들이 돈을 내고 탑에 올라 휴런호수의 경치를 볼 수 있었지만 큰돈은 벌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막내인 에디슨은 몸이 약해서 엄마의 큰 걱정이었습니다. 이미 두 아이를 어릴 때 잃어 버렸고 에디슨의 첫 번째 생일 전에 세 번째 아이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발명의 시작

휴런항구와 가장 가까운 큰 도시인 디트로이트를 연결하는 기차철도를 보며 12살인 에디슨은 증기 기관에 매혹되어 기차에서 신문과 사탕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기차에서 팔고 있는 과학책, 신문, 잡지, 소설, 등을 전부 읽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말겠다고 결심했지만 10권 정도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이즈음 에디슨은 귀가 잘 안 들린 다고 느꼈고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에디슨은 그의 귀가 안 들리는 것이 큰 재산이라고 했습니다.
귀가안들리니까 일을 하는데 덜 산만하고 외부 잡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잠도 깊게 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는 안 들렸지만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들을 잘 활용했습니다. 10대의 에디슨은 아주 기업가 적이었습니다. 휴런 항구에서 신문과 잡지를 파는 가판대를 두 개나 운영하면서 다른 소년들을 고용했습니다. 1862년에 6개월간 그 자신의 신문인 위크리 헤럴드를 발행했습니다. 철도 직원의 도움으로 기차 짐칸에서 인쇄를 했습니다. 이 신문은 지역 뉴스와 철도 관련 기사를 실었는데 기차를 이용하는 많은 독자들이 읽었습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기차 짐칸에 작은 실험실을 만들었습니다. 실험실에는 병, 전지, 시험관들로 가득 했는데 화학 물질인 인을 실험하다 화재가 나서 실험실과 인쇄기를 철도 직원이 모두 내려 버렸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계속 철도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서 예기치 않은 전환점이 일어났다.

어느 날 역장의 어린 아들이 화물기차가 오고 있는데 철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에디슨은 철도로 뛰어가 아이를 안전하게 구출해 내었습니다. 보답으로 역장은 에디슨에게 아주 복잡한 철도 전신기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6살에 전기 기사로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전신 부호를 말로 말을 부호로 바꾸는 빠른 판단력과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월급도 많았고 유망한 일 자리였습니다.



그의 생애를 변화시킨 전보

기차를 타면서부터 에디슨은 새로운 전신 기술을 배웠습니다. 1840년에 특허를 받은 모르스 전신기술은 19세기의 월드와이드 웹에 해당하는 것으로 에디슨은 정보 고속도로를 항해할 모든 기술을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그 당시의 전신 기술은 여러 나라들을 연결 해주고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전신기술이 에디슨이 성장할 세계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요 신문사들은 뉴스 서버스사로부터 전신기사를 사서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전화도 발명되지 않았고 이 메일, 인터넷 기술은 꿈도 꾸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다음 4년간 에디슨은 남부와 중서부 지역을 옮겨 다니며 순회 전신 기술자로 일을 했습니다. 전신기사들은 문자나 숫자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 전선을 통해서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데 이들은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는 일뿐 아니라 전신 기계를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유지하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에디슨은 실용적인 전기기술에 대해 많이 배웠고 어떻게 축전지가 작동하고 전기회로 전자기학에 대해서도 알게되었습니다. 이런 호기심이 그의 발명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발명 경력의 전환점

2년 후에 1871년에 그는 뉴저지주의 도시인 뉴어크에서 공장과 실험실을 차렸습니다. 뉴어크는 그 당시 숙련된 기계 기술자들의 사회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전신 기계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해 에디슨은 같이 일하든 메리 스털웰과 결혼했습니다. 1874년에 에디슨은 첫 번째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동일 회로에 의한 4중 송신 기계장치를 개발했습니다. 이 것은 전선 하나로 한 방향으로 하나이상의 통신문을 보낼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2개 통신문을 보낼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습니다. 전신 회사들에 있어서 이것은 대단한 발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선을 적게 쓰고도 많은 통신문을 보낼 수 있어 경비도 절감하고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디슨은 웨스턴 유니온 회사와 경제적으로 아주 유리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돈으로 뉴저지 시골에서 "발명 공장 "이라 불려 지는 멘로파크에 거대한 실험실을 지어 많은 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축음기와 전등

1876년 에디슨은 실험실을 뉴어크에서 멘로파크로 옮겨, 76∼81년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에 발명 사업은 번창하고 월스트리트의 부자들은 그의 특허를 손에 넣으려고 다투었습니다. 1876년에는 미국독립 100주년기념 세계박람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어 A.G.벨의 전화기 실연이 크게 호평받았습니다. 그는 벨의 기기를 개량하여 탄소 알갱이에 의한 가변저항형 송화기를 고안하여 78년에 특허를 받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송화기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또한 전화의 음성을 재생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1877년에 최초의 축음기를 조립하였습니다. 녹음에는 처음에 주석박을 사용했는데 78년에 이것을 납관으로 바꾸었습다. 그는 축음기를 그가 가장 아끼는 발명품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연구 과제는 전등의 실용화였습니다.
이미 1870년대에는 탄소선 사용이 유망해져서 78년부터 백열전구의 연구에 몰두한 그는 수은 배기펌프의 개량과 탄소필라멘트의 채용으로 79년 10월 21일 40시간 이상 계속해서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었습니다. 필라멘트 재료로는 대나무가 적당하다는 것을 알고 전세계의 대나무 산지로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한 결과 일본 교토 부근의 야와타〔八幡〕의 대나무가 가장 좋다는 것이 입증되어 약 10년간 이 대나무가 사용되었습다. 또한 그는 전구소켓 · 안전퓨즈 · 적산전력계 · 지하케이블 · 정전압직류발전기 · 배전반 등 전등의 부대 설비에서 발·송전, 배전에 이르는 전기기체계(全器機體系)를 고안하였습니다. 82년에 세계 최초의 중앙화력발전소가 런던과 뉴욕에 설치되어 에디슨전등회사가 창립되었습니다. 또한 83년 전구의 실험중에 발견한 <에디슨효과>는 20세기에 들어와 열전자방출현상으로서 연구되어 진공관에 응용됨으로써 오늘날 전자공업 발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이 만든 발전기와 배전설비를 이용하여 독자적인 전기기관차를 만들어 1883년부터 전기철도사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사업가로서의 에디슨

1887년 그는 실험실을 웨스트오렌지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는 45∼60명의 직원들이 그의 발명에 협력하여 그 무렵 세계 최대의 연구개발기관이 되었습니다.
88년에 축음기를 개량하였고, 91년에는 영화의 촬영기·영사기, 1891∼1900년에는 자력선광법, 1900∼10년에는 에디슨축전지 등을 차례로 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의 회사는 전등특허권을 둘러싼 소송으로 많은 비용이 들게 되어 에디슨은 회사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결국 전등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전력 수송의 장래에 대하여 고압 교류방식이 유리함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그의 실수였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한 뒤 한때 사업을 그만두고 해군고문회의 회장이 되어 군사기술 문제에 몰두하였습니다. 전후 다시 웨스트오렌지로 돌아와 고무대용식물 등을 연구했습니다.



창조에 대한 신조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라는 그의 일생 동안의 신조는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학강의를 경멸했고 보통교육에 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다. 독창적인 사고가 길러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만년에는 <나는 발명을 계속할 돈을 손에 넣기 위해 항상 발명하는 것이다>라고 술회하여 끊임없이 창조 활동을 계속하였던 끈질긴 발명가의 심경을 엿보게 합니다. 밀란에 있는 그의 생가는 사적이 되었고, 미시간주 디어본으로 옮긴 멘로파크실험실과 웨스트오렌지실험실은 각각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1929년 10월 21일은 백열전구 실험에 성공한 지 50년째가 되는 해로서, 국제적인 전등 50주년제가 실시되었으며, 그가 죽은 31년에도 성대한 에디슨추도회가 거행되었습니다. http://kid.chosun.com/kidstudy/edu4i/kidchosun/scientist/20010406.htm


고흐의 가족   



고흐의 부모
테오도루스 반 고흐(1822년생)는 안나 카르벤투스(1819년생)와 결혼했다. 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잘 생긴 남자'로 통했으며, 온화한 성격을 가진 평범한 목사였다. 서적 판매상의 딸이었던 안나 카르벤투스는 친절하고 존경받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장남 고흐의 까다로운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에게서 인정받기를 무척이나 갈구했던 고흐는 자신들의 계급과 시대에 충실한 이 전형적인 부모에게 골치거리였다.

고흐의 형제와 누이들

고흐의 여동생 안나는 고흐보다 두 살 아래였다. 고흐는 안나와 영국에서 같이 일할 때 처음에는 사이좋게 지냈다. 안나보다 두 살 아래가 테오였고 다시 두살 아래가 엘리자베스였다. 테오는 고흐의 일생동안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며, 고흐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고흐와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1910년 고흐에 대한 회상록을 썼다. 빌헬미엔은 고흐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였지만 고흐의 파리 시절에 서신을 주고 받았다. 열세 살 밑 동생인 막내 코르넬리우스는 1900년 고흐처럼 자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테오의 아내인 요 봉거 반 고흐는 고흐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다. 그녀는 한번도 고흐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형제의 비극적인 죽음 후에도 제 몫을 다했다. 그녀는 고흐가 쓴 수백 통의 편지를 옮겨 적고 편집한 후 고흐의 위대함이 인정받을 때를 기다려 그것을 출판했다.

빈센트의 친척

고흐의 삼촌들


빈센트에게는 5명의 삼촌이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센트), 헨드리크 반 고흐, 하임 반 고흐, 코르넬리우스 반 고흐, 요한네스 반 고흐. 그 중, 앞의 네 사람은 화상이었으며, 이는 초기에 고흐가 화랑의 점원이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해군 장교였다.

고흐의 외사촌, 케 보스

케 보스는 고흐의 이모인 빌헬미나와 스트리커 목사 사이의 딸로, 고흐보다 두살이 많았다. 그녀는, 고흐가 절망적인 사랑 고백을 거절했으며(미망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로 인해 고흐는 비참함에 빠진다.

안톤 모브

1881년 후반 고흐는 헤이그로 이주해 헤이그 유파의 주요 화가이자 외사촌인 안톤 모브에게 그림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흐의 성격과 창녀와 사는 고흐의 모습을 보고 고흐와의 관계가 멀어졌다.

http://vangogh.dreamwiz.com/

고흐의 삶   

◆ 고흐의 삶 - 첫번째 이야기 (1/5) ◆
http://vangogh.dreamwiz.com/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1873~75년 5월까지는 런던에서,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다. 날마다 예술 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진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8년에 브뤼셀에서 복음전도사로 단기연수를 받기 위해 이 계획을 포기했다. 정통교리의 접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그가 순간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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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의 삶 - 두번째 이야기 (2/5) ◆

  

고흐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년의 10년뿐이었고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1881년 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1883년 자연 속에 홀로 있고 싶은 충동과 농부들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모베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찾아가는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을 지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때 브라반트의 누에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누에넨에서 보냈으며, 이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는데,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탄광 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제르미날 Germinal'(1885)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많은 그림, 예를 들면 '베짜는 사람들'과 '감자먹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점차 그는 누에넨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할스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끝손질 기법이 시각적 인상의 참신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로네세와 들라크루아로부터는 색채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뒤 루벤스에 열중하게 되어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안트워프로 갑자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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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의 삶 - 세번째 이야기 (3/5) ◆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 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워프를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또한 테오는 구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피사로와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몽마르트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색상은 마침내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밝아졌다. 1888년 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 및 '탕기 영감의 초상'과 '이젤 앞에 선 자화상'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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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의 삶 - 네번째 이야기 (4/5) ◆

  

그후 12개월 동안 (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 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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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의 삶 - 다섯번째 이야기 (5/5) ◆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알피유 가족',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 지방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인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로 갔다.

4년전 누에넨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 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은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엔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 (1891. 1. 25) 만성 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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